처음 책을 읽었을 땐 '명성보다는 별룬데...?' 라는 생각을 했다. '이 정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다.
예를 들어 '제 3장. 아날로그식 기획'.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할 때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작정 컴퓨터 앞에 앉아 파워포인트부터 실행하는 게 아니라 종이나 펜, 화이트보드 등을 이용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기획하라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연한 얘기다. 파워포인트는 내 프리젠테이션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도구이지, 아이디어 자체를 만들어주는 도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파워포인트보다 좋다는 '키노트'앞에 앉아 반나절을 키보드랑 마우스를 잡고 있어도 좋은 프리젠테이션은 만들 수 없다.
또 '제 5장. 단순함이 중요한 이유'도 너무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싶다. 디자인을 이론적으로 공부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 '미적 감각'이란게 조금은 있어서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을 볼 줄은 안다. 거창하게 불교의 선(禪, Zen)사상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메시지를 전달할 때, 특히 슬라이드처럼 메시지가 주로 '텍스트'의 형태로 전달될 때에는 단순함은 미적인 단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기능을 한다.
단순함은 프리젠테이션을 떠나 '미적 감각'의 수준이다. 즉,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단순함이라는 게 참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사람은 많은 그림이나 슬라이드를 보고 비교해 가면서 '감각'을 끌어올리는 게 먼저다. 감각수준의 '단순함'을 아무리 선이고 Zen이고 간에 설명해봤자 힘들다는 얘기다.
디자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슬라이드를 처음 만들어도 알아보기 쉽고, 모양새가 이쁜(화려한 게 아니라!) 수준으로는 만든다.
마찬가지로 '제 6장. 프리젠테이션 디자인의 원리와 기술' 중 '신호 대 잡음 비의 원리'에서도 마찬가지로 '미적 감각'이 요구된다. 즉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도통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일 수 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중간에 샛길로 많이 샌다는 것...준비 단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샛길로 많이 새는데, '제 2장. 창의력, 한계, 제약조건'은 과감히 빼버려도 괜찮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은 프리젠테이션 책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
1. 당연한 얘기지만 실제 안지키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예를 들은 '무작정 컴퓨터 앞에 앉아 파워포인트부터 실행시키고 보는 사람들'. 백날 앉아 있어봤자 좋은 결과물이 안나온다.
2.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보자. 내 경우는 스토리텔링까지는 안만들지만, 머릿속으로 한장면 한장면 떠올려보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한다.
3. 구체적인 자료는 유인물로 만들어 배포하자. 종종 프리젠테이션 자료 보면서 일일이 받아적는 학생을 본 적이 있다. 유인물을 만들어 주거나, 인터넷을 통해 다운받을 수 있게 하면 서로 편하다. 굳이 슬라이드안에 알아보기도 힘든 작은 글씨로 죄다 써넣을 필요가 없다.
4. 그림 우위의 효과. 이것도 당연한 얘기지만 막상 이런 슬라이드를 보기가 힘들다. 대부분 텍스트를 목록으로 나열했을 뿐. 사실 고급스럽고 프리젠테이션에 어울리는 그림을 구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적절한 그림이 텍스트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이런 원칙적인 이야기 뿐만 아니라 실천적 도움도 많이 받을 수 있다.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은 그림을 배경 전체로 채우고, 그 안에 텍스트를 넣는 방법이었다. 나는 주로 LaTeX의 beamer패키지를 이용해 만들거나, 가끔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둘 다 '템플릿'을 이용해 만든다. 그런데 템플릿안에 내용을 끼워맞추자니 그림을 배경 전체로 채운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이 책 보고 많이 깨쳤다. 게다가 템플릿이란 통일된 형식만 계속 나타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겠구나 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이 책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는 또 하나는 '제 3장. 아날로그식 기획' 중 '올바른 질문을 던져라'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청중이 오직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무엇이어야 하는가?"
여러 질문이 있지만, 이 질문은 프리젠테이션의 목표를 명확히 하고,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준다. 난 프리젠테이션 준비하면서 한 번도 '청중이 오직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 좀 충격적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약간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글머리 기호에 대해 한 마디(p. 144)'이다.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글머리 기호가 끝없이 이어지는 슬라이드로는 아무도 좋은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없다. 절대로, 글머리 기호가 잘 먹혀 드는 경우는 보고서 같은 문서에 아주 가끔 등장해서 독자로 하여금 내용을 슬쩍 훑어보도록 도와주거나 요점을 정리할 때 등이다. 대체로 강연에서 사용하는 글머리 기호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이어서 145페이지에서는
"슬라이드당 글머리 기호는 몇 개가 적당한가?"
글머리 기호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발표 내용을 뒷받침하는 다른 적당한 방법이 있는지 충분히 검토한 후에 사용하라. 소프트웨어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템플릿에 글머리 기호가 버젓이 들어가 있다고해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글머리 기호가 최선의 선택이 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글머리 기호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발표 내용을 뒷받침하는 다른 적당한 방법이 있는지 충분히 검토한 후에 사용하라. 소프트웨어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템플릿에 글머리 기호가 버젓이 들어가 있다고해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글머리 기호가 최선의 선택이 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아직도 납득이 잘 안되는 부분이다... 만만한 게 글머리 기호였는데;;;
어쨌든 이 책은 이름만큼의 값어치를 충분히 한다.
처음 이 책 읽고나서는 '이대로 하면 교수님한테 욕먹겠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에 글머리 기호 없이 그림으로 꽉 찬 배경에서 달랑 한 문장만 있는 장면이 계속 나오면 교수님이 "자네, 설렁설렁 준비했군."이라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만약 내가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제대로 전달을 했다면 오히려 내가 만든 자료는 내 발표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인상이 남을 것이다.
이 책 '추천의 글'에서 가이 가와사키라는 사람은 "99%의 프리젠테이션은 형편없습니다."라고 했다. 내 프리젠테이션도 99%안에 속하리라. 그래도 계속 노력하면 1%에 속하게 될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 비율도 2%가 되고, 3%가 될 것이다.
계속 99%에 머물기 싫으면 이 책읽고 배웁시다.
ps. 책이 고급스럽다. 표지도 이렇게 만들면 제작비가 더 올라간다고 알고 있는데...암튼 내용을 떠나 책 자체가 잘 만들어졌다.
트랙백 : http://blog.edple.com/trackback/880
-
Subject 스토리텔링과 프리젠테이션
2008/07/08 17:55
요즘 이모저모 관심있게 보는 주제 중 하나가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를 "대화를 통해 쉽게 이해시키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아마 원시시대 부족들에게 부족신화를 이야기해주던 주술사와 야심만만에서 쉬지않고 크게 영양가는 없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내던 강호동은 최고의 스토리텔러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가 바로 스토리가 없는 소프트웨어, 서비스, 그리고 제품은 사용자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주변에서 가..
-
에이콘 2008/07/04 11:23
안녕하세요. 멋진 서평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미약한 부분도 잘 짚어주시고 좋은 점도 부각해주셔서 책을 읽으려는 분들께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Pre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