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 about "한라산"

2017년 제주 여행(5월 4일)

올해도 제주도를 다녀왔다. 계획한 여행이 아니고 회사에서 5월 4일이랑 5월 8일 특별한 일 없으면 쉬라고 해서 제주도를 갔다. 제주의 5월은 프라임 계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역대 최악의 날씨와 최악의 미세먼지였다.

아무튼 늦게나마 여기에 정리한다.

5월 3일.
저녁 6시 비행기인데 1시간 가까이 연착되서 밤이 되어 제주도에 도착했다. 오늘 숙소인 예하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9시가 훨씬 넘었다. 내일 새벽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콜 택시를 예약했다. 2010년부터 거의 매년 들르는 게스트하우스인데, 처음으로 한 스탭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여태껏 늘 친절한 인상만 주던 곳이었는데… 아무튼 오랫동안 근무하던 분이 안 보이니 조금 서운하다.

5월 4일.
간식이라곤 작은 생수 2병 밖에 없다. 관음사 코스 입구에 가면 뭘 팔겠지. 하고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너무나 휑하다. 등산객도 거의 없을 뿐더러 관음사 입구 가게도 문을 열지 않았다. 후딱 백록담까지 오르고 진달래 대피소가서 먹으면 되겠다 싶었다.
왠걸. 힘이 하나도 없다. 어제도 제대로 된 밥은 못 먹고, 공항에서 햄버거 먹고, 라운지에서 간식 좀 먹고, 숙소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 먹은 게 전부다. 힘이 들기는 커녕 배가 고파서 오를 수가 없는 지경이다. 게다가 밤새 잠꼬대 하는 사람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눈도 감긴다. 큰일났다.
꾸역꾸역 오르는데 속도가 안 난다. 자꾸 멈추어 쉰다. 진짜 내려가고 싶다. 헬기 부르고 싶다. 그리고 점점 추워진다. 삼각산 대피소에서 고작 물 몇 모금을 마셨다. 옆에 아가씨 두 명이 왔다. 간식을 먹는다. 한 입만 달라고 하고 싶었다. 초코바가 너무 너무 먹고 싶었다. 하지만 겁나 시크한 척 하며 바람막이 점퍼만 입고 자리를 나섰다.

속도가 안 난다. 너무 배고프다. 이젠 졸립기까지 하다. 자고 싶다. 젠장. 아까 대피소에서 봤던 아가씨 둘이 나를 앞질렀다. 초코바 하나만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아직 덜 고팠나보다. 그렇게 아쉽게 아가씨들을 그냥 보냈다.

갈 수록 힘들다. 한 걸음 떼기가 너무 힘들다. 위에서 중년 부부가 내려온다. 최대한 불쌍한 티 안내면서 간식 좀 달라고 했다. 아, 이렇게 얻어먹을 거라면 아까 얻어먹을 걸. 나는 바보다.

자유시간 2개를 주셨다. 너무 감사하다. 하나는 바로 먹고 하나는 킵했다. 배로 단 게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살 것 같다. 여전히 힘은 안 나지만 좀 살 것 같다. 물은 있냐고 물어보시기에 차마 물 까지는… 작은 병 하나 밖에 남지 않았지만 물은 괜찮다고 했다.

자유시간을 먹으면서 올라갔는데 하나 다 먹고 나서 킵 했던 자유시간도 마저 먹어버렸다. 이래서야 킵했다고 할 수 있으려나. 아무튼 나는 킵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2개를 다 먹었는데도 힘이 안 난다. 배도 여전히 고프다. 또 중년 부부가 내려온다. 또 먹을 것 좀 달라고 했다. 자유시간 하나와 달달한 과자를 주셨다. 중년 부부들은 자유시간을 좋아하나보다.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며 다시 걸었다.

처음 출발할 때는 하늘이 좋았다. 다만 정상 부근에 구름이 잔뜩 껴서 백록담은 일치감치 포기했다. 그런데 정상에 올라갈수록 이슬비같은 비 같지도 않은 비가 내린다. 그런데 바람이 엄청 불어서 이 비를 무시할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무거운 DSLR을 배낭에 넣고 새로 산 이쁜 선글라스도 배낭에 넣었다. 정상이 가까울 수록 비바람이 거셌다.

백록담 도착. 이 와중에 동료와 함께 온 사람들은 단체 사진을 찍는다. 주변이 하나도 안 보이지만 열심히들 찍는다. 나는 시간을 기록하기 위한 사진만 하나 찍고 바로 내려왔다. 게다가 엄청 추워서 오래 있을 수도 없다. 장갑 안 가져온 것을 후회할 정도로 추웠다. 산에서 주머니에 손 넣는 것은 좋은 행동은 아니지만, 손이 너무 시려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엄청 빨리 내려갔다. 아까 잠깐 봤던 아가씨 두 명도 내려가고 있다. 나는 춥고 배 고파서 천천히 갈 수가 없다. 오로지 진달래 대피소에서 사발면과 영양갱을 먹겠다는 신념 하나로 내려갔다.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다. 사람이 많다. 실내에서 먹을 수가 없다. 사발면을 들고 밖에 나왔다. 면이 다 익기도 전에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맛 있을 수가. 평소에는 먹지 않는 라면 국물도 거의 다 먹었다. 가볍게 물로 입을 헹구고 바로 내려왔다. 엄청 빨리 내려왔다. 내려오다보니 배 고프다. 영양갱을 마저 먹었다.

성판악이 이렇게 멀었나?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다. 젠장. 이 상황을 알았더라면 산을 안 탔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하산하면 바로 시내가서 삼겹살 먹을 생각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하산 완료. 버스를 타고 중앙로터리로 향했다. 동문로터리에도 먹을 게 있지 않을까 싶어 내렸다. 식당을 찾는 중에 바로 앞에 보이는 서귀포중학교에 대통령 보궐선거 투표소가 있다. 잘 됐다. 여기서 관외자 투표를 했다.
나는 당연히 1번 문제인을 찍었다. 선관위가 못 미더워 선에 닿지 않게 아주 이쁘게 잘 찍었다. 지금은 당선된 지 한 달을 넘기고 전례없는 높은 지지율을 보이지만, 이 때는 그래도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투표를 했다.

투표를 마치고 났더니 점심시간도 아니고 저녁시간도 아니다. 오늘 묵을 행복나무 게스트하우스에 전화해보니 사람이 없어서 바베큐파티가 없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가야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맛있는 고기집을 찾기로 했다. 걷다걷다 보니 서귀포 중앙동 우체국 근처에 있는 모이세 해장국집으로 가게 됐다. 사실 이 시간에 먹을 만한 삼겹살 집이 그리 많지 않았다. 메뉴판을 보니 제주 흑돼지 1인분이 무려 2만원이다. 다른 거 먹을까 생각했지만 진짜 제주도 흑돼지라 비싼 거라며 정말 맛있다고 하길래 그냥 먹기로 했다. 냄새 안나고 안 질겨서 먹기 좋긴 했지만 2만원 어치 값어치를 하는 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공기밥과 같이 나온 장국이 정말 맛있었다. 정말 너무너무 맛있어서 한 그릇 먹고 또 먹었다. 다른 밑반찬들도 먹어보니 일단 음식 솜씨가 있는 분이다. 이 식당에서는 왠만한 건 다 맛있을 듯.

오늘, 내일 묵을 숙소인 행복나무 게스트하우스는 처음 가보는 지역이다. 서귀포시외버스정류장에서 거의 한 시간 반을 달려야 갈 수 있다. 그렇게 빨리 달렸는데 한 시간 반 거리면 정말 먼 거리다. 한참 졸다가 깼다. 버스가 엄청 빨리 달리기 때문에 내일 즈음에는 정류장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긴장해야 했다. 정류장에 내리니 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지도를 봤는데 방향을 모르겠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데 숙소 주인분에게 전화가 왔다. 알려준 방향대로 찾아갔다.

숙소는 깨끗했다. 인테리어를 보니 여간 신경써서 만든 게 아니다. 2010년 이래로 이런 저런 게스트하우스를 다녀봤는데 여기가 제일 이쁘다. 도미토리인데 손님이 별로 없어서 4인용방을 혼자 쓰게 됐다. 한라산을 다녀와서 빨래거리가 있는데 마침 잘 됐다. 씻고 빨래하고 나서 마사지 기계로 다리 마시지를 했다. 오랜만에 등산이라 종아리 근육이 뭉쳤다. 너무 피곤해서 푹 잠들고 싶었는데 경상도에서 온 아저씨 둘이 치맥을 시켜먹으며 계속 떠든다. 거슬린다.